월성박씨(月城朴氏)

1. 관향조 박언의(朴彦儀)는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경명왕의 아들 8대군(大君)분적(分籍)할 때 본관(本貫)을 월성(月城)으로 하였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고려 때에 대능직(戴陵直)을 지낸 인육(仁育)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인육(仁育)의 증손(曾孫) ()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인천 해변에 숨어 살면서 그곳을 장아동(藏我洞)이라 이름하고 뒷산을 장아산(藏我山)이라 칭하고는 산정에 망경대(望京臺)를 쌓아 개성(開城)을 바라보면서 망국의 한을 달랬으며 태종(太宗) 방원(芳遠)의 끈질긴 요청에도 번번히 거절하면서 벼슬에 나가지 않는 절개를 지켰다. 효자로 이름난 민수(敏樹)는 천성이 아름다와 주변의 부러움을 샀으며, 성리학(性理學)에 심취하여 많은 문집(文集)을 남겼다. 제인(齊仁)은 선조(宣祖) 때 왕자사부(王子帥傅)를 지낼 정도로 인품이 고매하였으며, 월성 박씨의 긍지를 높인 응상(應祥)은 임진왜란 때 나라가 위태로움에 처하자 70이 넘은 병든 몸으로 전장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순절한 절신(節臣)이었다. 또한 홍미(弘美)는 생원시(生員試)와 증광문과(增廣文科)의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재직중, 선정(善政)을 베풀어 표리(表裏:임금이 내리는 옷감)를 하사받았으며, 그 이듬해 목민관(牧民官) 중 치적(治績)이 제일이라 평가받아 승진되어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지냈다.

 이외에도 문장(文章)이 뛰어나 당시의 석학(碩學)들과의 교유를 통해 탄탄한 지위를 확보했던 홍중(弘中), 광해군(光海君)의 비윤리적 폭정에 항거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돕다가 유배되었으나 후에 풀려났다. 현재 남한에 7.251가구 22.917명이 살고 있다.

2. 항열표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도(道)

현(顯)

조(祚)

두(斗)

현(鉉)

해(海)

3. 월성박씨 계보

4. 월성대군 단비 월성박씨 11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