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성단과 밀성재(익성사)

밀성단(영남루: 嶺南樓)

밀성재와 익성사

 

 

 밀성단<밀성대군 단(密城大君 壇)>                                                                                            자료발췌: 밀성재지

1. 문헌(文獻)을 상고(詳考)하면 종인 현령(縣令) 희(暿: 號 四五堂)과 수춘(壽春:호 菊潭)등 37인 외 후손으로 본부(本府)에 도임(到任)한 이유달(李惟達)과 여러 차례 사우(祠宇)을 건립(建立)하여 밀성대군 봉향(奉享)하고자 주선(周선(旋)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고 1634년(인조12 甲戌)에 영남루 상(嶺南樓 上)에 설위(設位)하여 치제(致祭)하였다.

 

2. 1725년(영조 1乙巳)에 종인들이 시축(尸祝)을 건의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3. 1857년(철종 8丁巳)에 태학관(太學館)이 통문(通文)을 돌려 건사(建祀)의 의론(議論)이 창도(倡導)되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4. 1881년(고종 18 辛巳)으로 붙어 1916년(丙辰)에 이르기까지 30유 여 년(有 餘年) 단향(壇享)의 공론(公論)이 이어져 왔다.

1922년(壬戌)년 음윤(陰閏) 5월13일에 대 폭우(大 暴雨)로 유실된 영남루 북정(嶺南樓 北庭)에 구광(舊壙: 옛 무덤)이 발견되어 전송(傳誦)하는바에 따라 밀성대군의 유지(遺址)임이 믿을 만하여 우선(于先) 밀양 청도 양군(兩郡)의 종족(宗族)사이에서 설단(設壇)의 협의가 이루어져 그 해 당국에 단지(壇地) 대여(貸與)을 신청하여 1923년(癸亥) 3월7일에 무상으로 영남루 북정(嶺南樓 北庭) 유허(遺墟)에 12평을 허락받아 사업 추진이 구체화  되었다. 1924년(甲子) 음력 5월 3일 8역(八域 13도) 밀성박씨대종회를 영남루상에서 개최하니 참석 종인이 천 여명(千餘名)이 되었다.

 

5. 1925년(乙丑) 10월 19일(음력 9월 2일) 300여년의 성손들의 숙원(宿願)이 성취되어 영작만세유전(永作萬世遺傳)의역사를 새롭게 장(章)을 여는 날이라 원근종원(遠近宗員) 및 전향사림(全鄕士林) 기타회집(其他會集)한 관중이 5000여인이라 인산인해(人山人海)을 이루었다.

 

6. 1928년 정묘년에 가까운 밀양 무안리에  제단을 만들어 밀성대군 휘 언침. 삼한 벽공도 대장군 휘 욱. 요동 독포사 란을 아울러 3대 할아버지를 제사하니 이곳을 경덕단 이라고 한다.

 

영남루 주위 밀성대군 단.천진궁. 아랑각. 박시춘 노래 비 생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