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사왕 본기(婆娑王 本紀  시향은 매년 청명)

 파사왕본기 신사원년(辛巳元年)에 비김씨(妃金氏)를 봉하여 사성왕후(史省王后)를 삼았다. 임오2년에 영을 내리기를 지금 창고가 비고 군기가 둔하여 쓰지 못하게 되었는데 만약수재(萬若水災)와 한재(旱災)들고 변방으로 적들이 침입을 하면 어떻게 막을리오 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군사를 훈련하고 전구를 마련하여 불의에 대비하도록 하시고 친히 시조묘(始祖墓)에 제사 하였다. 갑신4년에 크게 풍작글 이루어 길가는 행인이 양식을 싸들고 가는 준비가 필요없게 되었다. 정해7년에 가소(加召) 마두(馬頭)의 두성을 쌓았다. 경인10년에 왕은 사자 십명(使者 十名)을 각 고을에 파견하여 주주(州主) 군주(郡主)로서 공사를 게을리하여 전지(田地)를 황폐하게 한자를 살피게 하고 이런 주군주는 관직을 파하게 하였다. 계사13년간에 고령자를 위문하여 곡물을 하사 하였다. 갑오14년에 가야왕이 마두성(馬頭城)을 포위함으로 아손(阿飡) 길원(吉元)을 파견하여 이를 지게 하니 군사1000명을 거느리고 나가서 적을 격파 하였다. 병신16년에 가야사람들이 남쪽 변방을 침범함으로 왕은 성주가소장세(加召長世)를 파견 하여 이를막게 하였는데 패하여 적에게 피살되었다. 왕은 크게 노하여 친히 날랜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나가싸워 적을 패주 시키니 가야와은 사신을 파견하여 사죄 하였다. 신축21년에 금성동남(金城東南)에 새궁성을 쌓아 월성(月城)이라 이름하고 왕이 이거(移居)하였다. 실직(悉直)과 압독(押督) 두나라가 와서 아복(阿伏)하였다 계묘23년에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실직곡국(悉直谷國)이 서로 지경을 다투다가 왕에게 아서 판결을 구하였으나 왕 께서 이를 금관국 수로왕이 연노하고 지혜가 많으나 그를 불러 묻자 하시고 수로왕을초빙하니 이를 음즙벌국에 소속 도록 하였다.

 을사25년 에 백제가 사신을 파견 하여 화친을 청하였다. 병오26년에 왕께서 압독(押督)을 순행하시어 빈궁한 사람을 구휼(救恤) 하였다. 무신28년 에 비지(比只) 창령, 다벌(多伐) 대구, 초팔(草八) 초계(草溪)세나라를 쳐서 병합시켰다. 기유29년 에 황재 가 있어 겁해(劫害:곡식의 피해)가 심함으로 와은 널리 산천에 제사를 드려 재해 의 지식을 빌었는데 황재(蝗災)가 없어지고 풍년이 들었다. 임자32년 10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태자인 지마 (祗麻)가 왕이 되어 피사왕을 선능 언덕 안쪽 묘좌에 장사 하니 이를 오능 이라 한다

2. 파사왕능

사적 제 172 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다섯 무덤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과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초기의 네 박씨 임금과 혁거세왕은 왕후인 알영왕비의 능으로 전해 온다. 오릉은 내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경주시내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삼국시대 신라고분과 같이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원형 봉토분이다. 남쪽에 있는 숭덕전은 혁거세왕의 제향을 받드는 제전으로 본래 조선 세종 11년에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 타 버렸다. 현존하는 건물은 선조 33년에 재건하여 숙종 20년에 수리한것이며, 경종 3년에 숭덕전으로 사액되었다. 경내에는 영조35년(1759)에 세운 혁거세왕과 숭덕전의 내력을 새긴 신도비가 있다.또한 이곳은 신라 박씨의 시조인 혁거세왕의 『삼국유사』에 기록된 건국신화가 전해오고, 숭덕전 윗편에는 알영왕비의 탄생지인 알영정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