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해왕본기(남해왕 본기 시향은 매년 청명)

 을축 원년(乙丑 元年) 비(妃)인 김씨(金氏)를 봉하여 운제왕후(雲帝王后) 를 삼고 계비석씨(繼妃昔氏)를 봉하여 아루왕후(阿婁王后)를 삼았다. 병인삼년 춘정월(春正月) 에 시조묘(始祖廟)를 세우고 사시(四時)에 친(親)히 제사 지냈다. 무진년 사월에 왕 은 석탈해(昔脫解)가 어질다는 말을 들으시고 맞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기사오년 이해에 백제가 마한을 쳐없애다. 갑술십년에 왜인들이 해변을 칩입하여 민가를 약탈 함으로 왕은 육부(六部) 의 군사를 뽑아 막았다. 이때에 낙랑(樂浪)에서는 서라벌 의 국내가 허약하다고 칩입하여 금성(金城)을 공격함으로 사세(事勢)가 위급하였다. 그런데 밤에 유성(流星)이 적의 병영에 떨어지니 적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알천상류(閼川上流)로 물러나서 진을 치고 돌무더기 이십개를 쌓아 놓고 도망하였다. 이때 육부의 군사천명은 적을 진격하여 알천 경주에 이르렀으나 돌무 더기를 보고 아직 적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으로착각하여 추격을 중지하였다. 경진십육년에 북명(北溟:강릉)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濊: 고조선부족국가)의 왕인(王印)을 얻어서 나라에 바쳤다. 갑신(甲申)년 九月에 왕이 돌아가심으로 태자유리(太子儒理)가 왕이되어 남해왕을 선왕 (先王)의 능(陵)언덕 안쪽 묘좌(卯坐)에 장사하였다. 왕이 장차 돌아가시려고 할때 유리(儒理)와 탈해(脫解)에게 이르기를 내죽은 뒤에 너이들 박석(朴昔)두 성중에 연장자나 또는 덕있고 어진이로 이어 왕을 삼으라 하더니 죽음에 미쳐 유리(儒理)는 탈해(脫解)가 본래에 덕망이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려고 사양하니 탈해 (脫解)가 말하기를 "신기대보(神器大寶)"라 하는 왕위는 용렬한 사람이 감당할바가 아님니다.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치(齒)가 많다하니 시험 해 봅시다 하고 턱을 물어 치(齒)를 셈하니 유리(儒理)임금이 많은고(故)로 군신들은 유리(儒理)를 받들어 임금으로 모셨다.

2. 남해왕릉 (오릉: 사적 제 172 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다섯 무덤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과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초기의 네 박씨 임금과 혁거세왕은 왕후인 알영왕비의 능으로 전해 온다. 오릉은 내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경주시내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삼국시대 신라고분과 같이 표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원형 봉토분이다. 남쪽에 있는 숭덕전은 혁거세왕의 제향을 받드는 제전으로 본래 조선 세종 11년에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 타 버렸다. 현존하는 건물은 선조 33년에 재건하여 숙종 20년에 수리한 것이며, 경종 3년에 숭덕전으로 사액되었다. 경내에는 영조35년(1759)에 세운 혁거세왕과 숭덕전의 내력을 새긴 신도비가 있다. 또한 이곳은 신라 박씨의 시조인 혁거세왕의 『삼국유사』에 기록된 건국신화가 전해오고, 숭덕전 윗편에는 알영왕비의 탄생지인 알영정터가 있다.